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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서(金景瑞)

작성자 최고관리자 등록일 2015-12-29 00:08:09 조회수 667회 댓글수 0건

이름

김경서(金景瑞)

파명

성보(聖甫)

관직

시대

조선

정보


김경서(金景瑞)

1564(명종 19)∼1624(인조 2). 임진왜란 때 무장. 본관은 김해. 초명은 응서(應瑞), 자는 성보(聖甫). 용강에서 살았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 1588년(선조 21) 감찰(監察)이 되었으나, 집안이 미천한 탓으로 파직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었다. 그해 8월 조방장(助防將)으로 평양공략에 나섰으며,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평안도방어사에 승진되고, 다음해 1월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원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운 뒤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權慄)의 지시로 남원 등지에서 날뛰는 토적을 소탕하였으며, 159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때, 선조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동래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송상현(宋象賢)의 관을 적진에서 찾아오라 하자, 그 집 사람을 시켜 일을 성사시켰다. 또한, 이홍발(李弘發)을 부산에 잠입시켜 적의 정황을 살피게 하고, 일본 간첩 요시라(要時羅)를 매수하여 정보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1597년 도원수 권율로부터 의령의 남산성(南山城)을 수비하라는 명을 받고 불복하여 강등되었으며, 160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군졸을 학대하고 녹훈(祿勳)에 부정이 있어 파직되었다가, 1604년 전공을 인정받아 포도대장 겸 도정(捕盜大將兼都正)이 되었다.
1609년(광해군 1)정주목사를 지내고, 이어 만포진첨절제사(滿浦鎭僉節制使)와 북로방어사(北路防禦使)를 역임하고, 1615년 길주목사, 1616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2년 뒤에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때, 임진왜란 이후 세력이 강성해진 건주위(建州衛)의 후금 정벌을 위해 명나라의 원병 요청이 있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가 되어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함께 출전하였다.
이듬해 심하(深河)지방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살이호(薩爾滸)의 전투에서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고 선천군수 김응하(金應河), 운산군수 이계종(李繼宗) 등이 전사하자 강홍립과 함께 적진에 통하여 출병의 부득이함을 말하고 잔여병과 함께 후금에 투항하였다.
포로가 된 뒤 비밀리에 적정을 탐지한 기록을 고국에 보내려 했으나 강홍립의 고발로 탄로나서 처형되었다. 우의정에 추증되고 향리에 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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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의 여울목에서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 민족의 수난을 극복한 충의지사가 연면히 이어져 언제나 이 땅을 지켜왔으니 여기 조선 중기의 무장으로 민족 최대의 수난기인 임진왜란 때 평양과 부산을 탈환하는 데 혁혁?공을 세우고 후금(後金:淸)에 대항하여 온 몸으로 민족을 구해낸 살신성인의 충의지사가 있었다. 그가 양의공 김경서(金景瑞)이다.

그는 1561년(명종 19년) 평남 용강군 양곡면 남상리에서 당시 현감 벼슬에 있던 김인용(金仁龍)의 아들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응서(應瑞), 자는 성보(聖甫)였고, 후에 경서로 개명했다. 평양지(平壤誌)에 의하면, 공의 어머니 정씨 부인이 어느 날 꿈에 오석산(烏石山)에서 한 줄기의 서광이 일어나 김인용의 집까지 길게 뻗어 날아드는 것을 보고 그날부터 태기가 있었다. 오석산 산신령이 이를 알고 산지기(호랑이를 말함)를 불러서 말하기를 '네가 인간이 되기를 원하니 이제 그 기회가 왔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저 산아래 밭에서 김매는 부인을 잡아먹으면 오늘 중으로 인간으로 화할 것이다' 라고 했다. 이에 호랑이가 즉시 김매고 있던 부인에게 달려드는데 갑자기 수만 군사가 호랑이에게 달려들어 활을 겨누니 호랑이는 그 자리에서 사살되고 그 부인이 낳은 아이가 바로 그 호랑이의 화신인 양의공 김경서 장군이다" 라는 기사가 실려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하여 항상 전쟁 놀이를 즐겼고 병서를 탐독 했으며, 15세에는 시작(詩作)에도 능하여 장부가를 불러 청년들이 즐겨 따라 불렀다고 한다. 20세에 무과에 급제(선조 16년 1583년)하여 부위(副慰)가 되어 전라도 이진(利津)의 권관 (종8품)으로 첫 부임했다. 29세가 되던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으니 7년에 걸친 대전란으로 전 국토가 유린되었다. 15만 왜병들이 조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4월 14일 부산으로 상륙했던 왜군은 그 해 5월 서울을 함락하고 6월에 평양을 점령했다. 김경서는 이 때 별장으로 명나라 원병대장 이여송(李如松)과 합류하여 평양성 탈환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때 그의 무용담에 대한 일화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의기(義妓) 계월향과 묘계를 내어 소서행장 부장의 목을 벤 일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는 1693년 이여송과 더불어 평양성을 탈환하고 다시 경상도 방어사로 전임되었는데 이 때 왜장 가등청정의 사야가(沙也哥)는 남부여대하여 피난하는 우리 민족의 참경과, 또 충과 효로 점철된 조선민족의 미풍양속과 찬란한 문화에 감복하여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뉘우치고 부하 3천여명 함께 경상병사에게 투항하였다. 당시 김경서는 사야가를 앞세워 왜병이 차지한 16개의 성을 탈환했다. 이어 1595년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고,1598년 7년에 걸친 대전란이 끝나고 1604년 12월 유명한 고승 유정(사명당) 을 따라 강화 사절로 도일하여 일본의 도쿠가와와 담판하였다. 사명당(四溟堂)과 김경서는 덕천 막부를 설득시켜 민간인 포로 3천여명 송환해왔다. 귀국하자 그 공로로 포도대장이 되어 수도 치안을 담당했으며 훈련대장을 겸하였고, 뒤이어 가선대부로 일등 공신이 되고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이 부렵 만주 건주위의 추장 누루하치가 후금이란 나라를 세워 자못 위세를 떨쳤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명(明)나라에서는 조선에 원병을 청해 후금을 치려고 했다. 당시 광해군은 후금의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것을 알면서도 명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마지못해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아 군사 1만 3천여 명을주어 명나라를 도와 출정케 했으니, 이 때가 1618
년 10월이었다. 창성(昌城)을 거쳐 만주로 진격한 정벌군은 1619년 심하(深河:남만주) 전투에서 승리하였으나 다음 부차(홍경 지방) 전투에서 패배하자 강홍립이 전군을 이끌고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그러나 김경서장군은 비밀리에 적정을 탐색 기록하여 본국에 보내려다 강홍립에 발각되어 청군에 고발되었다. 장군은 이로 인한 갖은 고문과 악형, 회유에도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늠름한 조선인의 기개를 보이다가 1624년 마침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때 장군의 나이 64세였다.

조정에서는 훗날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장군에게 우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양의공으로 내렸다. 후일 장군의 아들 득진(得振)도 무과에 급제하고 손자 두흥(斗興),두유(斗愈) 형제 역시 나란히 무과에 급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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