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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

작성자 최고관리자 등록일 2015-12-30 06:10:02 조회수 3,603회 댓글수 1건

이름

김유신(金庾信)

파명

관직

시대

신라

정보

삼국통일의 주역


신라의 명장. 가야국(伽倻國)의 김수로왕의 12세손. 서현(舒玄)의 아들,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손녀. 만명(萬明). 609년(진평왕31)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리면서 화랑정신(花郞精神)으로 심신(心身)을 수련(修鍊)했다. 629년(진평왕51)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서 낭비성(娘臂城) 전투에 출전하여 고구려군을 격파했고,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다. 644년(선덕여왕13) 소판(蘇判)이 되어 상장군(上將軍)에 오르고 백제군과 수차 싸워 이겼으며, 647년(진덕여왕 1) 반역을 꾀하는 비담(毗曇)·염종(廉宗)의 반군을 토벌한 후 무산성(茂山城).감물성(甘物城)에 침입한 백제군을 격퇴했다. 648년(진덕여왕 2) 백제의 대량주(大梁州)를 공격하여 12성을 함락, 이찬(伊찬)이 되어 상주핸군 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올랐다. 이듬해 침입한 백제군을 도살성(道薩城)에서 격파했고, 654년 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알천(閼川)과 상의,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했다. 660년(무열왕 7)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唐)나라 소정방(蘇定方)과 연합, 사비성(泗?城)을 함락,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로써 신라의 삼국 통일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663년(문무왕 3)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고, 665년 당나라의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에 봉해졌다. 667년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 이듬해 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었으나 병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고구려 정벌 후 태대각간(太大角干)에 승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여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했다.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장사지냈고, 835년(흥덕왕10)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追尊),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祭享).

인내와 극기가 낳은 명장 김유신(金庾信)
김수로왕의 13세손인 김유신(金庾信)은 진평왕 17년 충북 진천에서 서현(舒玄)장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엄격하게 혈통을 따지는 신라 귀족사회에서 위험과 고난을 자진하여 도맡아 헌신적이고 비장한 자세로 모진 고난과 풍상속에서 삼국통일의 원훈이된 공은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그를 따르는 낭도를 용화햔도라 한다. 17세때 고구려,백제의 잦은 침략을 보고서 삼국통일의 큰 뜻을 품고 진천군 이월면에있는 속칭 장수굴이라 불리는 중악산 석굴속에 들어가 목욕재개하고 경건하게 비법 체득을 하늘에 빌었다. 4일만에 드디어 한 노인이 나타나 '여기는 독충과 맹수가 많은곳인데 귀한 소년이 어찌 홀로 왔느냐'라고 하자, 김유신은 '저는 신라 사람인데 나라의 원수를 보고 마음이 아파 여기 와서 신(神)의 도움을 얻고자 이렇게 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노인은 김유신의 인내와 정성을 칭찬하며 방술의 비결이 담긴 책과 청룡검을 주었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이 보검에 영기가 서렸다고 기술하고 있으며,이 보검으로 바위를 갈랐다고 한다. 단석산(斷石山)이란 바로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월성군 서면 금척리 남산에 있으며, 당시 용화 향도들이 화랑정신으로 심신을 수련하던 영험한 지역이라 한다 이와 같이 비상한 수련과 고초를 딛고 우뚝선 김유신에게는 여러가지 일화가 많다. 어느날, 백석이란 고구려 자객이 김유신을 죽이고자 화랑의 무리속에 끼어들어 젊은 김유신을 유인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음모를 알아차린 김유신이 백석을 문초하니 백석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고구려)의 군신이 말하기를, 신라의 유신은 우리나라의 도사 추남(秋南)의 화신이다. 국경에 물이 거꾸로 흐르므로 왕이 그를 불러 점을 치게 하였다. 추남이 말하되 대와으이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하므로 그 표정이 이와 같다 하매, 대왕이 놀라 괴이하게 여기고 왕비는 크게 분노하여 다른일로 다시 시험하여 그 말이 맞지 않으면 중형에 처하자고 제안했다. 왕이 왕비의 제안을 받아들여 쥐 한마리를 함속에 감추고 이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으니, '그것은 쥐인데 그 수가 8마리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그말이 틀린다 하여 죽이려하니 추남이 맹세해 말하기를, '내가 죽은뒤에 대장이 되어 고구려를 멸하겠다'고 했다. 곧 그의 목을 베고 함을 열어 쥐의 배를 가르니 새끼가 일곱마리 있었다. 그제야 추남의 말이 옳은겄을 알았다.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이 신라 서현공 부인의 품속에 들어가는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에서는 백석을 보내 김유신을 죽이려 했다' 는것이다. 이처럼 김유신은 이미 화랑에 있던 때에도 신라뿐만 아니라 고구려,백제에서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나라 고종이 백제,고구려를 멸한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신라를 합병하지 못한것을 크게 꾸짖으니 소정방이 말하기를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오나 그 왕은 영명하고 김유신 같은 충용한 장군이 있어 온 국민이 굳게 단결하여 가벼이 도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는<<삼국사기>>에도 전해 오고있다. 김유신은 효용이 절륜한 무인이기도 하지만 국가관과 민족관이 뚜렷하여 당나라의 영토적 집착을 단호히 물리치고 감언이설을 일축했다. 김유신은 일찍이 가풍을 형성하고 그 가훈을 엄하게 지켰으며, 이를 신라 국민정신과 화랑정신으로 승화시킨 일세의경륜가였다. 가훈을 어긴 아들 원술을 끝내 용서치 않고 부자의 연을 끊어 버리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자신과 가정에 대해 엄격한 그의 성품이 삼국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수있다. 김유신은 백제(660년)와 고구려(668년)를 차례로 멸하여 삼국을 통일한 후 태대각간의 직위를 받고 673년 7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 후 162년 만인 42대 흥덕왕 10년(835년)에 흥무대왕으로 추봉되니, 인신으로서 대왕에까지 오르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김유신(金庾信)
김유신(金庾信) 595(진평왕 17)~673(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심적인 구실을 한 장군 대신 (大臣).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왕족의 김씨(金氏)와 구별하여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 그것은 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귀족(眞骨貴族)으로는 편입되어 있었지만,왕족 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세운 큰 전공으로 전하는 것은 629년 34세 때부터 나타난다. 당시 신라군은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했는데, 1차 접전에 패배하여 전의를 잃고 딨었다. 이 전투에 그는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하여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김춘추가 고구려에 청병하러 간 642년(선덕여왕 11), 종전에 적대관계에 있기도 했던 고구려로 가기에 앞서, 교섭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김춘추는 그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했다. 그들은 당시에 신라 조정에서 아직 최고서열에는 들지못했지만, 보수적 신라귀족들의 성향에서 보면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될 그들의 정치적 결속이 이미 여기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그 무렵의 주(州)는 지방행정단위로서보다는 군사작전구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고, 주에 파견된 군주도 지방주둔군 사령관으로서의 성격이 컸다. 642년 김춘추가 고구려를 향해 떠날 때에는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군주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신라에서 군사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뒤의 활약이 뚜렷이 나타난다. 644년에는 소판(蘇判)이 외었고, 그해 9월에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지휘관이 되어 전략상의 요충인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7개성을 점령하였다. 이듬해 정월에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미리포성(買利浦城)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못 만난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그리고 그해 3월에도 귀환하기 전에 또 백제의 침입으로 출동하였는데, 이때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당시 전열은 정비하여 즉시 떠나게 되자, 가족들이 문 밖에 나와 기다리는 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50보쯤을 가서야 말을 멈춘 두,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그리고 “우리집 물이 아직도 예전 같은 맛이 있다.”고 말하고는 출발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이르기를, “대장군도 이러하거늘 우리들이 어찌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하고는 분발하여 나아가니, 백제군이 그 기세만을 보고도 퇴각하였다고 한다. 또한 647년에는 귀족 내부의 반란 진압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 반란의 결과는 그 뒤 신라 정계의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보인다. 반란세력의 우두머리는 당시 귀족회의의 장인 상대등 배담(毗曇)이었다 그들은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명활성(明活城)을 거점으로 월성(月城)의 왕족세력을 공격하였다. 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는가 하면, 흉조라고 믿고 있던 유성(流星)의 추락이 월성 쪽에 있어, 왕실측의 사기는 위축된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이때 이치로써 새로 등극한 진덕여왕과 귀족들을 설득하는 한편, 종교전인 제전과 계략으로 왕실 쪽 군중의 사기를 북돋워 반란군과의 결전에서 승리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된 알천(閼川)도 전통적 신라의 귀족이었다. 반란의 진압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도 컸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야계 출신으로 신라 중앙정부의 운명을 결정함에 큰 구실을 했고, 또 그로 인하여 그의 영향력도 커질수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비담의 반란후 진더여왕대에 세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기록되어 있는데,그 전투들의 최고지휘관을 맡았다. 진덕여왕 1년(647)과 2년의 전투는 압량주군주로서 그 일대의 전투를 지휘한 형태였으나, 진덕여왕 3년의 전투는 백제의 대대적인 침입을 막기 위하여 중양군으로 평성된 군단을 지휘하였다. 당시 백제의 지휘관급 100명과 군졸8,9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전투용 말 1만 필을 노획했다는 전과를 고려할 때, 신라 쪽에서도 주력부대를 투입한 대규모 방어군단의 편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편성에서도 대장군에 김유신, 그 아래 장군들에 진춘(陳春) 죽지(竹旨) 천존(天存) 등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당대의 명장들이 자정치적으로도 큰 비중을 가지는 인물들이었다. 태종무열왕의 즉위 후 그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높아졌다. 신라본기에는 태종무열왕의 즉위 다음해의 관등이 대각간(大角干)으로 나타난다. 그해 10월에 태종무열왕의 셋째딸 지소와 혼인하였다. 이는 태종과의 결속이 더욱 긴밀해짐의 반영인 동시에 종전과는 달리 가야계 출신으로서의 제약을 벗어나 왕실과도 통혼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660년 정월에는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어, 그는 삼국통일 전생과정의 신라를 이끄는 중처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해에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태종무열왕을 뒤이은 문무왕의 즉위뒤에도 정치적 비중은 약화되지 않았다. 661년(문무왕 1) 6월에 고구려를 원정하였다. 이 원정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군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한 당나라 군대를 지원하려고 고구려 중심부까지 왕복하는 결사적인 수송작전을 하고,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이듬해 정월에 고구려군의 매복과 추격을 물리치고 돌아왔다. 663년에는 백제부흥을 꾀한 백제유민과 그들을 지원한 왜(倭) 의 연합을 격파하였고, 664년에도 백제유민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은밀한 계책을 일러주어 펑정하였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에 신라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그러나 늙고 쇠약하여 병으로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왕경(王京)에 남아 대신 왕까지 원전을 떠난 신라 국내의 통치를 담당하였다. 문무 왕과의 생구관계(甥舅關係)뿐만 아니라, 고구려 원정군의 수뇌인 김인문과 김흠순도 생질과 아우였던 만큼 그는 국가의 원로로서 고문과 지도적 구실을 하여 신라 진영의 단결과 전락수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를 평정한 직후에는 다시 한등급을 높인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 제수되고, 여러가지 특전을 부여한 포상이 있었다. 그뒤 자신이 직접 일선에서 정치나 군사적 일을 수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신라 지배층의 원로로서의 자문역은 계속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멸망 후 본격화된 당나라와의 투쟁에서도 지도적인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672년 석문(石門) 벌판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나라에 참패했을 때 문무 왕이 그에게 자문을 구했음이 나타난다. 그는 일찍부터 당나라의 대국주의 야욕을 경계하고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660년에는 백제군의 결사대를 격파하느라 당나라군과의 합류지점에 늦게 도착함을 빌미로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신라 장군의 참수(斬首)를 명하여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자, 그는 단호히 먼저 당나라 군과 결전하겠노라 맞서 소정방의 기도를 꺾는 바 있다. 또한, 백제가 정복된 해에는 소정방이 그와 김인문에게 백제지역을 분봉(分封)해주겠다고 유혹함으로써, 신라 지배층의 분열을 획책하며 신라를 침공할 기회를 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같은 유혹을 거절하여 신라 지배층의 결속을 굳힘으로써 당나라의 계략을 무산시키는 한편, 고구려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정면대결을 피해 신라 군을 백제유민 군으로 위장하여 당나라군의 행동에 군사적인 대처를 하였다. 당시 소정방은 신라는 상하가 굳게 결속되어 작지만 쉽게 정복할 수 없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한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665년에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식읍이천호(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로 봉하는 등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국제관계 속에서 당나라가 신라에 대해 노리고 있는 것을 파악하고 대처함으로써 당나라의 침략을 분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다衆)의 결속과 사기를 북돋우려는 한결 같은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 연속되는 출정에서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 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친다든가, 혹독한추위 속의 행군에 지친 군사들의 앞을 어깨를 드러내놓고 앞장선다거나,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 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해오자 왕에게 참수형에 처하라고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일 등은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의 사기를 북돋우려 노력한 것의 단면들이다. 그가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금산원(今山原:지금의 경주시 송화산 기슭으로 추측됨)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한다. 뒤에 흥덕왕(삼국유사에는 경명왕 때라 함) 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金庾信家門의 成立과 活動(申영植, 梨花史學硏究 13·14合輯,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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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유미 16-05-09 12:11 답변 삭제

    자랑스러운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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