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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손(金馹孫)

작성자 최고관리자 등록일 2015-12-30 06:37:24 조회수 1,026회 댓글수 0건

이름

김일손(金馹孫)

탁영(濯纓)

파명

삼현파 7세손

계운(季雲)

관직

시대

조선

정보

조선시대의 학자 ·문신


본관 김해. 자 계운(季雲), 호 탁영(濯纓), 시호 문민(文愍). 1486년(성종 17)에 생원(生員)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다. 예문관에 등용된 후,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4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고, 뒤에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직필하고, 그 뒤 헌납(獻納) 때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의 원한을 샀다.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화(禍)를 입었다.
이 일을 무오사화(戊午史禍)라 한다. 이를 계기로 새로 등장한 신진 사림(士林)은 집권층인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거세되었다. 중종반정(1506) 후 신원(伸寃)되고, 도승지가 추증되었다.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탁영문집》이 있다.

1486년(성종 17) 7월에 진사가 되고, 같은해 11월에 식년문과 갑과에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게 되었다. 그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의 연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환로(宦路)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를 거쳐 홍문관의 박사·부수찬·성균관전적·사헌부장령·사간원정언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뒤 홍문관의 부교리·교리 및 사간원헌납·이조정랑 등을 지냈는데, 관료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을 뿐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를 공격하는 반면, 사림파의 중앙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에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로 말미암아 능지처참의 형을 받게 되었다. 그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었다. 그리고 중종 때 홍문관직제학,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가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극일(克一)로부터 《소학》·사서(四書)·《통감강목 通鑑綱目》 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修己)’를 지향하는 한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을 지향하는 다른 한 계열의 인물들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대응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는데, 소릉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그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실세(失勢)를 가져다 준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 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 會老堂記〉·〈속두류록 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청도를 빛낸 역사적인 사람들
김일손(金馹孫)탁영선생의 고절
선생의 휘는 일손(馹孫)이오 자는 계운(溪雲)이며 호는 탁영(濯纓)이고 본관은 김해로 절효 김 극일(節孝 金 克一) 선생의 손자이고 남계 김맹 (南溪 金孟)선생의 아들이다.1464년. (이조 세조 10년)에 청도 운재리(지금의 서원동 )에서 태어났다 출생당시 앞내에서 서기가 무지개 같이 뻗쳐 선생이 나신 후에도 서기가 오랫동안 있었다 한다. 이와 같이 우주간기 (字宙間氣)로 태어난 선생은 천성이 총명하여 점필재 김 종직 (金 宗直) 선생의 문인으로 교우로는 동문인 한훤당 김 굉필(寒暄堂 金 宏弼)선생, 일두 정 여창 (一두 鄭 汝昌)선생과 친교가 있었다.선생은 1486련 (이조 성종 17년 ) 8월에 식년문과 갑과로 각각 장인급제 하였으며 그해 10월에 알성대과(謁聖大科)에또한 장원급제 하였다.시관이었던 사가정 서 거정 (四佳亭 徐 居正)선생의 추천으로 홍문관, 예문관 등의 청환직을 거쳐 1488년 (이조 성종 19년)왕의 특혜로 호당 (湖堂)에 들어가 수학하였는데 호당은 대과급제한 젊은 문신중에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왕의 특명으로 뽑아 학문을 닦고 인격을 도야하여 조정에 기용해서 장차 국사를 맡기기 위한 요원 양성기 관으로 이씨조선조 최고의 학당이다.그후 이조정랑 (吏曹正郎)이 이었으며 1490년 (이조 성총 21년)에 질정관 (質正官)으로 명 나라에 다녀오니 외교 사신으로 다녀왔고 다음해 28세 때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니 외교사신으로 두 차례나 다녀왔다. 그 때 명나라 황제가 하사 (下賜)한 많은 서예품(書藝品)과 특히 소학집설(小學集說)등도 선생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가져와 보급된 것으로 문화발전에 크게 공헌한바 있다. 또한 명나라에 머물때 명나라 명현(名賢), 정유(程愈)와 주전 (周銓) 등과 교결하였으며 후세에 우암 송 시열(尤庵 宋 時烈)선생 같은 분은 선생의 문집서문에 말하기를 선생의 문장은 양양대해 같고 중국의 문호 한 창여 (文豪 韓昌黎)에 비견하기도 하였다.이 와 같이 선생은 약관 20여세때 이미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있었다.선생은 성종때 춘추관(春秋관)좌 사관(史官)으로 있을때 전라도 관찰사 이 극돈(觀察使 李 克墩)의 비행을 사초에 직필하고 그뒤 이 극돈과 성준(成俊)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고하여 이 극돈의 친근을 샀고 실로 권신들의 부정 부폐를 직필하였다.그리고 스승 점 필재 김 종직(점 畢齊 金 宗直)선생이 쓴 조의 제문(弔義 帝文)을 사포에 실었다. 이 극돈은 자기의 비행이 사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고 선생에게 빼주기를 비밀히 간청하였으나 선생은 네 목숨이 다해도 뺄 수 없다 고 거절하였다. 이에 앞서 유 자광(柳 子光)이 함양 학사루(咸陽 學士루)에 놀러가서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걸어 두었는데 그후 점 필재 김 종직 선생 이 함양군수 (咸陽郡守)가 되어 이것을 보고 소인배 (小人輩)의 글이라 하여 떼어 불살아 버렸다.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하여 1498년(연산군 4년) 성종실록이 편찬될 때 훈구파의 이 극돈이 사국당상관(史局堂上官 )이 되어 사초를 정리하다 선생이 쓴 사초속에 세조의 찬위(築位)를 풍자(諷刺)한 김 종직 선생의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자신의 비행은 물론 궁중의 불미스러운 일들을 비롯 훈구파의 비행들에 대한 기록이 있음을 보았다. 원래 사초는 다른 사람들은 물론 왕도 볼 수 없는 것인데 이 극돈이 사원(私怨 )을 풀기 위한 것과 훈구파 권신들의 비행이 후세 영원히 남게 되자 이 극돈이 같은 훈구파의 유 자광 및 당시의 중신들인 윤 필상(尹 弼商), 노 사신(盧 思愼), 한 치형(韓 致형), 신 수근(愼 守勤) 등에 공개하여 평소 학문과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외곡 충동시켜 더디어 1498년 (이조 연산군 4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士禍)인 비참한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이로서 일어났다.무오사화(戊午史禍 : 士禍인데 史草에 의해 비롯되었다 하여 史禍라 쓴다)에 점 필재 김 종직 선생은 부관참시(剖棺斬屍)케 하고 선생은 향년 35로 능지처참(陵지處斬)을 당하게 되었다. 선생이 처형을 당하던날 갑자기 친지가 어두어지며 폭풍우가 일어나서 나무가 넘어지고 향리인 운계천 물은 3일이나 벌겋게 흘러내려 세인들은 선생의 충절과 기개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였다 한다. 그 당시 권 오복 (權 五福), 권 경유(權 景裕), 이 목(率 穆), 허 반(許 盤) 등 여러 선생들은 처형되었으며 김 굉필(金 宏弼), 정 여창(鄭 汝昌), 박 한주(朴 漢柱), 이 주(李 胄)등 선생들을 위시하여 많은 사류가 유배되었다. 이를 계기로 새로 등장한 신진사림 (新進士林)인 영남학파(嶺南學派)는 집권층인 훈구파에 의해 거세되었다.선생은 또한 1494년(성종 25년)에 단종의 후사(後嗣)와 소능(昭陵 : 성종 왕후)의 복위 등 전후 3회나 상소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1496년 (연산군 2년)에 선생이 충청 도사 (都事)로 있을 때 왕의 난정과 간신들의 부정부패 등을 간하는 상소를 여러번 올렸다. 선생은 이와 같이 문장과 충절의 선비이며 정서와 풍류도 즐겼으며 거문고는 신금 (神琴)으로 이름이 높았다. 선생은 연산군의 반정때 하야한 후 일 두정 여창 선생과 더불어 탐승유람(探勝遊覽)과 악양 (岳陽)의 뱃노리 등으로 서정과 낭만을 찾기도 하였다.1506년 (연산군 12년 : 중종 원년)에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후 신원(伸寃 )되어 복작하고 도승지(都承旨)와 이조판서 (吏曹判書)를 추증 받고 1830년 (이조 순조 30년)에 문민(文愍)의 시호를 내렸으며 선생의 출생지인 청도 서원동에 자제서원(紫溪書院)의 사액을 내리고 도승지 홍 처량(都承旨 洪處亮)을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또한 선생은 목천 (木川)의 도통서원(道東書院), 남원(南原)의 사동서원 (社洞書院), 함양(咸陽)의 청계서원 (淸溪書院)등 에도 봉안하고 있다. 선생의 유물은 사화 때 없어지고 생시 애용하던 벼루와 유묵 몇장, 교지 등이 종가에 가보로 보존되어 있다.

※ 무오사화(戊午史禍)의 원인과 민심

훈구파와 영남학파(사림파)의 분규 등 여러가지 원인이 있으나 근인은 이 극돈 과 유 자광의 사원 (私怨 )이 크다할 것이다. 이 극돈은 탁영 김 일손 선생이 평소 말을 끝까지 하기를 좋아하고 권세 있고 귀한 사람을 피하지 않은 곧은 성품을 못 마땅하게 여기왔다. 또 선생은 헌납 (獻納)의 자리에 있을 때 소를 올려 이 극돈과 성 준이 서로 모해해서 당쟁을 벌일 것이라고 했다. 이에 이 극돈이 크게 노했었다. 뒤에 사국(史局 )을 열게 되자 이 극돈이 당상관이 되었는데 이에 선생의 사초가 자기의 악한 것을 몹시 심하고 자세히 쓴 것과 또 세조조(世祖朝) 때의 일을 쓴 것을 보고 이 극돈은 이것을 가지고 자기 원한을 갚아 볼 마음을 먹었다.유 자광은 그가 일찌기 함양군에서 놀 때 시를 지어 군수에게 부탁하여 나무에 새겨 현안을 만들어 여러벽에 걸도록 한 일이 있었다. 뒤에 점 필재,김 종직 (金 宗直)선생이 그 고을 군수로 왔다가 이 것을 보고 『어떤놈이 자광의 현판을 감히 여기에 걸게 했느냐』하고 걷어다가 불태우게 했다. 이 말을 듣고 자광은 몹시 성을 내면서 한스럽게 여적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 때는 김 종직 선생이 임금에게서 받은 은총이 융성했기 때문에 원한을 감추고 오히려 그와 사귀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한편 연산군은 시기하고 포악해서 글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므로 더욱 문사를 미워 했었다. 이에 말하기를 『명예를 요구하고 웃사람을 업신여기며 나로 하여금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모두 이 무리들이다』 하고 항상 답답해 하고 즐거워하지 않아서 한번 쾌하게 마음을 풀어 보려고 했지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중에 자 광 등이 아뢰었다는 말을 듣고 자광에게 상 주고 옥사(獄事)가 시작된 것이다.이날은 낮에도 어둡고 비가 물붓듯이 쏟아지면서 곧 바람이 동남 쪽으로 부터 일어나서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나니 성안 사람들은 모두 쓰러지고 다리를 떨지 않은 이가 일었다. 그러나 자광은 의기가 양양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이로 부터 그의 위엄이 안팎에 진동하여 그를 마치 독사처럼 보고 감히 그 뜻을 거스르지 못했다. 또 유림들은 기운을 잃고 겁을 내어 글방이 쓸쓸하여 두어 달 동안 글 읽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때 부형들이 서로 경계하기를 "학문은 과거에 급제할 만하면 그만둘 것이지 많이해서 무엇에 쓰겠느냐" 했다. 이에 자광은 바야흐로 자기 마음데로 되었다 하여 다시 뒤를 돌아보고 꺼리는 바가 없었다. 또 그에게는 이를 즐기는 염치 없는 무리들이 모여들어 문에 가득하니 식자들은 이를 깊이 탄식해서 말하기를 "무술의 옥사는 정당한 사람이 간사한 무리를 공격했었는데 이제 무오의 옥사는 간사한 무리가 정당한 사람을 공격했으니 20년 사이에 한번은 이기고 한번은 패해서 치란이 서로 따랐도다. 대개 군자가 형벌을 쓰는 것은 항상 관대하고 늦추는 것이 실수이고 소인의 원수를 갚는것은 반드시 잔인하게 없애고 그만두는 법이다. 만일 무술년에 군자들이 그 형벌을 다 써서 소인들을 없앴드라며는 어찌 오늘날과 같은 화가 있었겠느냐 " 했다. 남곤(南袞)의 유 자광(柳 子光 )전에서선생은 고결한 학자였다고 안정 신 영희 (安亭 辛 永禧 ) 선생의 사우언행록(師友言行錄)에서 말 하기를 교리 김 일손(校理 金 馹孫)의 자는 계운 (溪雲)이다. 그는 참으로 세상에 드문 인재이며 조정의 큰 그릇이었다. 그의 소장(疏章)과 차자(箚子)는 글이 커고 넓어 큰 바다와 같았고 그가 나와 일을 의논하는 것과 사람의 시비를 말하는 것은 마치 청천백일과 같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폐왕 연산은 어찌하여 그를 사형에 처하여 시장에 버리는 형벌(刑罰)을 배풀었던가 라고 하였다.(참고문헌 : 인명대사전, 국사대사전, 도주지, 도주문화, 해동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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