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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저(金佇)

작성자 최고관리자 등록일 2015-12-30 06:43:43 조회수 1,000회 댓글수 0건

이름

김저(金佇)

파명

율은공(栗隱公)파

관직

시대

고려

정보

고려말 충신


목은(牧隱:이색), 야은(冶隱:길재), 포은(圃隱:정몽주)과 더불어 '고려4은'으로 추앙을 받아야 마땅한데도 역사의 그늘에 묻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고려말 충신 율은(栗隱) 김저(金佇)는 1304년(고려 충렬왕) 11월 4일 장흥 벽계리에서 출생하였다.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문하에서 사사하며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호두(虎頭)장군으로 알려진 고려 최대의 영걸 최영(崔瑩)의 생질인 공은 18세에 생원과와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건적의 난 때에는 공민왕을 호종하여 안동, 예천, 상주로 몽진하였다. 형조, 예조, 이조의 전서(典書)와 성균관 대사성, 수문전 학사를 역임하였고 대호군을 지냈으니, 실로 문무를 겸한 위대한 경세가였다. 그러나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퇴관(退官)을 청하니 조정에서는 풍성군(豊城君)에 봉했다. 벼슬을 버린 그는 예천 은풍(慇豊) 사동(巳洞)에 은거하며 집주변에 밤나무를 심으며 스스로 율은거사(栗隱居士)라 칭하고 은둔 생활을했다. 은둔 생활을 하던중 이성계가 고려의 충신들을 죽이고 임금을 폐하고 나라를 빼앗으려하자, 개성으로 올라가 정득후(鄭得厚), 곽충보(郭忠輔), 변안렬(邊安烈) 등과 은밀히 접촉하면서 비밀히 여주 유배소로 우왕을 방문하고 이성계 일당을 제거키로 결심했다. 약속대로 팔관일 밤, 그는 정득후와 더불어 칼을 품고 이성계 사저의 담을 뛰어 넘었다. 그러나 우왕의 신임을 가장 크게 받고있던 곽충보의 밀고로 김저, 정득후등은 기다리고 있던
순군들에게 체포되어 정득후는 자결하고 김저는 갖은 악형끝에 폭사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86세라고 하니 참으로 빼어난 의협심과 초인간적인 용기가 아닐수 없다. 고려사에는 이를 '김저 옥사사건' 이라 말하고 있는데, 연루자는 이색(李穡), 우현보(禹玄寶)등 당대 선비와 무인 30여명으로 고려조 최대 최후의 우왕 복위운동이었다. 공의 장례일에 시신 위에 한 마리의 청조(靑鳥)가 '고려충(高麗忠)' 을 세번 연호하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한다. 공의 순국일에 정경부인 경주김씨는 순사(殉死)하고, 아들 계절당(繼節堂) 전(鈿)은 식음을 전폐하여 목숨을 끊었으며, 손자 퇴신재(退愼齋) 방은 두문동 선비들과 함께 조선왕조의 벼슬을 거부했으니, 일문삼세(一門三世)의 충절은역사에 길이 남을것이다. 그의 사후 119년만인 1508년, 덕치주의를 표방한 중종이 그의 충절을 기려 신원을 복원하고 왕명으로 종가(宗家) 소재지인 예천 미호동에 표절사를 건립하였다.

율은공(栗隱公) 저(佇)파
뒤에 손(遜)으로 개명하였다. 중시조 저(佇)는 고려 공민왕때 전서.대호군을 지내셨으며 이성계에 반대하여 옥사하였다.아드님 전(鈿)은 공민왕때 대제학.찬성사를 지내셨고 나라가 망하자 두문동에서 자결하셨고 손자 두(두)도 분사(焚死)하셨다. 후손이 예천, 용궁, 봉화, 서울에 산다.후손 11명이 대과급제하셨고 후손중에 학자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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