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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인(金忠敏)

작성자 최고관리자 등록일 2015-12-30 06:54:46 조회수 854회 댓글수 0건

이름

김충인(金忠敏)

우정(愚亭)

파명

성언(誠彦)

관직

시대

조선

정보

임란의 용장


김충인(金忠敏)

선생의 자는 성언(誠彦)이요 호는 우정(愚亭)이며 김해인 호군 낙안당 김세중 (金海人 護軍 樂安堂 金 世仲)선생의 손자이고 분성군 서천 김 응수(益城君 西川 金 應壽)선생의 조카이다. 1558년(明宗 13년)에 태어나 영산현(靈山縣)에서 자라고 그 곳에서 세거하고 있었다.
1592년 (선조 25년)에 왜적이 처들어와 4월 14일에는 부산성(釜山城),동래성(東萊城)이 연이어 함락되고 일로는 김해(金海), 밑양, 청도, 대구로 해서 북상하고 한편 거창(居昌), 영산(靈山), 창녕(昌寧) , 고령(高靈), 김천(金泉)으로 해서 북상하여 5월 2일에는 서울이 함락 되었다.
5월 11일 그러니 왜적이 부산에 상 한지 28일만 이다. 이날 고령군 개진면 양정동(高靈郡 開津面 良田里)에서 송암 김면(松庵 金沔)장군이 의거를 결의하고 창이(倡義)하였다. 이때 선생은 영산(靈山)에서 나라가 왜적에게 분탕을 당하고 국토가 짓밟히고 백성들이 당하는 참상을 눈떠고 볼 수 없어 의분에 차 있던중 고령에서 송암 김면 (松庵 金汚)선생이 의병을 이르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그 휘하에 들어 갔다.
의병군에 가담한 선생은 6월 9일의 개산포(開山浦) 대첩(大捷)에서 용감히 싸웠다. 우척현(牛脊峴) 전투에서도 용감히 분전 하였다. 계속해서 사원동 전투(蛇院洞) 두곡역전(豆谷驛前)의 전투 사랑암(沙郎巖) 전투 등에 역전 하였다.
1592년 (선조 25년) 12월 25일 척후병의 보고가 "수 많은 왜적이 김친(金泉)으로 부터 추적하여 오고 있읍니다" 라고 하였다. 아군은 상주 (尙州)에 있던 호서병 (湖西兵)과 호남병(湖南兵)이 아직 오지 않고 있어 작전에 차질이 생겨 당황 하였다. 그러나 몰려오는 왜적을 맞아 아군은 앞으로 진격하다가 또한 후퇴하는 등 세번이나 싸우다가 마침내 퇴군 하였는데 군관 유 사홍 (軍官 柳 嗣弘)이 그때 전사 하고 아군은 다시 웅현 (熊峴)을 포위하고 처들어 가니 왜적은 돌출하여 오히려 아군을 포위할려고 하니 아군은 싸우고 물러나고 또 싸우고 물러나고 하며 격전을 거듭하니 왜적의 쓰러지는 자가 많았으나 아군도 고전이라 적 수급(首級)을 취하지 못하였다. 오직 계원장(繼後脚)이었던 선생과 함양 정병 (咸陽 精兵) 최 운(崔 雲)의 남노 (男奴) 억복 (億 1 ) 이 기마 왜병 (騎馬 倭兵 ) 을 사살하니 땅에 떨어졌다.
제면이 탓던 말을 붙잡고 말안장을 노획하니 금과 은으로 장식되매 있어-1 왜장(倭將)인 줄 알았다. 1593년 (선조 26년) 1월 12일 의병도대장 긴 면 (義兵都大將 金汚) 선생의 명령으로 왕자(王子 ) 관계로 해서 상주 (尙#·11 )에 과건 되기도 하였다.
의 병 토대 장 김 면 (義兵都大將 金 汚沔)선생이 병사하자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 경상도 관찰사 (觀察使 )로 있었던 김 수 (金 輝) 휘하 (摩下)에 짧은 동안 전공을 세우다가 홍의장군 곽재우(紅衣將軍 郭 再祐)선생의 휘하에 들어가 전투 마다.)용전 하였다.
왜적이 1597년 (선조 30년) 또 처들어와 정유재란 ( 丁酉再亂)을 일으키자 홍의 장군 곽 재우(紅衣將軍 郭 再祐 )선생을 중심으로 의병군이 창녕 (昌寧)에 있는 차왕산성 (火旺山城)의 성곽을 수축하여 방어전에 들어 갈때 선생은 조전장(助戰將)으로 활약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초유사 학봉 김 성일 (招諭使 鶴峰 金 誠一)선생치 막료(幕僚) 였던 송암 이로 (松巖 李 魯)신생은 철성인 (鐵城人)으로 임진왜란 때 김 학봉 (金 鶴峰)을중심 하여 일록(日錄)으로 쓴 용사일기 (龍蛇日記)에 의하면 선생을 말하기를 영산(靈山) /사람으로 난이 일어나자 의병대장(義兵大將) 인 김 면 (金 沔 )선생의 막하에서 활약하였고 임란 당시 의령현감(宜寧縣監) 오 응창(吳 應昌 )은 공무를 버리고 도주한 뒤로 체적이 분탕하여 보전할 길이 전혀 없는 형편이였으나 홍의장군 곽 재우(紅衣將軍 郭 再祐) 선생이 맨먼저 기병함으로써 적이 감히 엿보지 못하였다.
새 의령현감(宜寧縣監 )이 된 우정 김 충인 (愚亭 金 忠敏)선생은 1592년 (선조 25년 임진) 10월에서 다음해 3월까지 의령현(宜寧縣)좌 성 쌓는 감독관이 되었고 또한 의령 (宜寧 ) 은 선생치 외가 (外家 ) 곳이라 하였다. 한편 임란 당시 경상도 관찰사 (觀察使) 였던 김 수 (金 輝)와홍의장군 망우당 곽 재우(紅衣將軍 忘憂堂 郭 再枯)선생이 원수처럼 되어 있을 때 중간에서 활약한 바도 있다고 한다.
(참고문헌 :용사일기, 화왕산, 동고록, 송암선생실기, 국사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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