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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首露王 [ 김수로왕 ]

작성자 최고관리자 등록일 2015-12-31 23:40:34 조회수 1,175회 댓글수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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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首露王 [ 김수로왕 ]

천지(天地)가 처음 열린 이후로 이곳에는 아직 나라 이름이 없었다.  그리고 또 군신(君臣)의 칭호도 없었다.  이럴 때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유수간(留水干)·유천간(留天干)·신천간(神天干)·오천간(五天干)·신귀간(神鬼干) 등 아홉 간(干)이 있었다.  이들 추장(酋長)들이 백성들을 통솔했으니 모두 100호(戶)로서 7만 5,000명이었다.  이 사람들은 거의 산과 들에 모여서 살았으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곡식을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42) 3월 계욕일(계浴日)에 그들이 살고 있는 북쪽 귀지(龜旨; 이것은 산봉우리를 말함이니, 마치 십붕十朋이 엎드린 모양과도 같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에서 무엇을 부르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백성 2, 3백 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양이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한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아홉 간(干) 등이 말한다.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자 또 말한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귀지(龜旨)입니다."  또 말한다.



 "하늘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였으므로 일부러 여기에 내려온 것이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되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겠다'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놀게 될 것이다."  구간(九干)들은 이 말을 조*ㅊ아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다가 얼마 안 되어 우러러 쳐다보니 다만 자줏빛 줄이 하늘에서 드리워져서 땅에 닿아 있다  그 노끈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에 금으로 만든 상자가 싸여 있으므로 열어보니 해처럼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배(百拜)하고 얼마 있다가 다시 싸안고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놓아 두고 여러 사람은 각기 흩어졌다.  이런 지 12시간이 지나,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그 합을 여니 여섯 알은 화해서 어린아이가 되어 있는데 용모(容貌)가 매우 훤칠했다.  이들을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들이 절하고 하례(賀禮)하면서 극진히 공경했다.  이들은 나날이 자라서 10여 일이 지나니 키는 9척으로 은(殷)나라 천을(天乙)과 같고 얼굴은 용과 같아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같다.  눈썹이 팔자(八字)로 채색이 나는 것은 당(唐)나라 고조(高祖)와 같고, 눈동자가 겹으로 된 것은 우(虞)나라 순(舜)과 같았다.  그가 그달 보름에 왕위(王位)에 오르니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해서 이름을 수로(首露)라고 했다.  혹은 수릉(首陵; 수릉首陵은 죽은 후의 시호諡號다)이라고도 했다.  나라 이름을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또 가야국(伽耶國)이라고도 하니 이는 곧 여섯 가야(伽耶) 중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가서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니 동쪽은 황산강(黃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동북쪽은 가야산(伽耶山)이며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겨우 3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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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로왕(首露王)


42년 ~ 199년


가락국의 시조.


2


거등왕(居登王)


199년 ~ 253년

아버지는 수로왕(首露王),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  건안(建安) 4년 기묘(己卯; 199) 3월 13일에 즉위(卽位), 치세(治世)는 39년으로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 9월 17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음.  <개황력(開皇曆)>에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시조(始祖)가 금란(金卵)에서 난 까닭으로 김으로 성을 삼았다."고 했음.


3


마품왕(麻品王)


253년 ~ 291년

마품(馬品)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가평(嘉平) 5년 계유(癸酉; 253)에 즉위.  치세(治世)는 39년으로, 영평(永平) 원년 신해(辛亥; 291) 1월 29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孫女) 호구(好仇)로 태자(太子) 거질미(居叱彌)를 낳음.


4


거질미왕(居叱彌王)


291년 ~ 346년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영평(永平) 원년에 즉위.  치세 56년, 영화(永和) 2년 병오(丙午; 346) 7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아궁아간(阿躬阿干)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王子) 이시품(伊尸品)을 낳음.


5


이시품왕(伊尸品王)


346년 ~ 407년

김씨(金氏).  영화(永和) 2년에 즉위.  치세는 62년, 의희(義熙) 3년 정미(丁未; 407) 4월 10일에 죽음.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음.


6


좌지왕(坐知王)


407년 ~ 421년

김질(金叱)이라고도 함.  의희(義熙) 3년(407)에 즉위.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국내가 시끄러웠다.  계림(鷄林)이 꾀를 써서 치려 하므로, 박원도(朴元道)라는 신하가 간했다.  "유초(遺草)를 보고 또 보아도 역시 털이 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하늘이 망하고 땅이 꺼지면 사람이 어느 곳에서 보전하오리까.  또 점쟁이가 점을 쳐서 해괘(解卦)를 얻었는데 그 괘사(卦辭)에 '소인(小人)을 없애면 군자(君子)가 와서 도울 것이다'했으니 왕께선 역(易)의 괘를 살피시옵소서."  이에 왕은 사과하여 옳다고 하고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치세는 15년으로, 영초(永初) 2년 신유(辛酉; 421) 4월 12일에 죽음.  왕비는 도령대아간(道寧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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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희왕(吹希王)


421년 ~ 451년

질가(叱嘉)라고도 함.  김씨(金氏).  영초(永初) 2년에 즉위.  치세는 31년 동안, 원가(元嘉) 28년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음.  왕비는 진사각간(進思角干)의 딸 인덕(仁德).  왕자(王子) 질지(질知)를 낳음.


8


질지왕(銍知王)


451년 ~ 491년

김질왕(金질王)이라고도 함.  원가(元嘉) 28년에 즉위.  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함.  치세는 42년.  영명(永明) 10년 임신(壬申; 492) 10월 4일에 죽음.  왕비는 김상사간(金相沙干)의 딸 방원(邦媛).  왕자 겸지(鉗知)를 낳음.


9


겸지왕(鉗知王)


491년 ~ 521년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함.  영명(永明) 10년에 즉위.  치세 30년,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출충각간(出忠角干)의 딸 숙(淑).  왕자 구형(仇衡)을 낳음.


10


구형왕(仇衡王)


521년 ~ 532년

김씨(金氏).  정광(正光) 2년에 즉위.  치세는 42년.  보정(保定) 2년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 탈지이질금(脫知이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長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왕비는 분질수이질(分叱水이叱)의 딸 계화(桂花)로, 세 아들을 낳으니, 첫째는 세종각간(世宗角干), 둘째는 무도각간(茂刀角干), 셋째는 무득각간(茂得角干)이다.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壬子; 532)에 신라에 항복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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