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김완(金完) | 호 | |
파명 | 자 | 자구(子具) | |
관직 | 시대 | 조선 | |
정보 | 조선 중기의 무신 |
1577(선조 10)∼1635(인조 13).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 자는 자구(子具). 영암출신. 아버지는 이성현감(利城縣監) 극조(克#조47)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어린 나이로 용맹이 알려져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의 휘하에 들어갔고, 이해 여름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의 막하에 있다가 임기가 끝나 돌아오다가 적을 만났다.
사인(士人) 조경남(趙敬男) 등과 궁장현(弓藏峴)에서 20여명을, 둔원내촌(屯院內村)에서 10여명을 목베었으며, 장치(獐峙)에서는 혼자서 수십명을 목베어 선혈이 반석에 낭자하여 후인들이 이 반석을 ‘혈암(血巖)’이라고 불렀다.
이듬해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에 머물고 있을 때 아버지를 무고하여 죽게 한 한덕수(韓德脩)가 도원수 권율(權慄)의 비장으로 병력점검을 위해 온 것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1601년(선조 34) 소파아권관 겸 단련사(小坡兒權管兼團練使)가 되어 명나라에서 보내오는 군량의 운송책임을 맡았다.
1603년 선전관이 되고 이듬해 금모포만호(黔毛浦萬戶), 1607년에 남원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뒤에 서울에 올라와 한덕수를 찾아 쏘았으나 죽이지 못하고 수년간 투옥되었다.
1615년(광해군 7) 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가 되고 다음해 절충장군, 1618
년 내금위장에 제수되었다가 곧 만포첨사(滿浦僉使)로 체임되었다. 1622년 평안좌도방어사, 다음해 평안도방어사 및 창성방어사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안현(鞍峴)에서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3등에 책록되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구성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고, 그뒤 다시 복관되어 부총관을 거쳐 전라우수사가 되었으나 모략으로 일시 투옥되었다.
그뒤 곧 풀려나 1634년에는 훈련원도정·황해도병사를 지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 〈李章熙〉
조선의 무신. 자(字)는 자구(子具), 이성 현감(利城縣監) 태조(兌켌) 의 아들. 대대로 영암(靈巖)에 거주. 임진왜란 때 용맹이 알려져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男) 휘하에 들어갔고, 이때 무과(武科)에 급제, 경상도 방어사(慶尙道防禦使)의 막하(幕下)로 있다가 전라도 병마절도사 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南原)에 갔을 때, 아버지를 무고하게 죽게 한 한덕수(韓德修)가 병력을 점검(點檢)하므로 찔러 죽이려다 실패했다. 모포 만호(毛浦萬戶)·남원 판관(南原判官) 등을 역임한 후 서울에 가서 한덕수를 찾아 쏘았으나 죽이지를 못하고 피체(被逮), 수년간 투옥되었다. 1615년(광해군 7) 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 고산진 첨절제사(高山鎭僉節制使)를 거쳐 창성 방어사(昌城防禦使)에 이르러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웠다. 이에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으로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고,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병조 판서에 추증(追贈), 시호는 양무(襄武).
김완(金完) 1577년(선조10)~1635(인조13). 조선 증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 자는 자구(子具). 영암 출신. 아버지는 이성현감(利城縣監) 극조(克조)이다. 1597년 정유재란때 어린 나이로 용맹이 알려져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의 휘하에 들어갔고. 이해 여름에 무과에 급제하여 경상도방어사 고언백(高彦伯)의 막하에 있다가 임기가 끝나 돌아오다가 적을 만났다. 사인(士人) 조경남(趙敬男) 등과 궁장현(弓藏峴)에서 20여 명을, 둔원내촌(屯院內村) 에서 10여 명을 목베었으며. 장치(獐峙)에서는 혼자서 수십명을 목베어 선혈이 반석에 낭자하여 후인들이 이반석을 ‘혈암(血巖)’이라고 불렀다. 이듬해 전라병사 이광악(李光岳)을 따라 남원에 머물고 있을 때 아버지를 무고하여 죽게 한 한덕수(韓德脩)가 도원수 권율(權慄)의 비장으로 병력점검을 위해 온 것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1601년(선조 34) 소파아권관겸 단련사(小坡兒權管兼 團練使)가 되어 명나라에서 보내오는 군량의 운송책임을 맡았다. 1603년 선전관이 되고 이듬해 금모포만호(黔毛浦萬戶), 1607년에 남원판관 등을역임하였다. 뒤에 서울에 올라와 한덕수를 찾아 쏘았으나 죽이지 못하고 수년간 투옥되었다.1615년(광해군 7)관무재시(觀武才試)에 급제,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가 되고 다음에 절충장군, 1618
년 내금위장에 제수되었다가 곧 만포첨사(滿浦僉使)로 체임되었다. 1622년 평안좌도방어사, 다음해 평안도방어사 및 창성방어사를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원수(元帥) 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안현(鞍峴)에서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에 책록되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구성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고, 그뒤 다시 복관되어 부총관을 거쳐 전라우수사가 되었으나 모략으로 일시 투옥되었다. 그뒤 곧 풀려나 1634년에는 훈련원도정?황해도병사를 지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仁祖實錄, 燃藜室記述, 國朝人物考1. 김수로왕(金首露王)의 성(姓)의 역사적인 고찰 ①소전공휘 덕성구보유기(少전公諱德承舊譜遺記) 삼국사게에이로기를 신라의 조상은 소호김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 임으로 금(金)으로 성(姓)을하였다.하고 신라고지(新羅古志)에는 김알지(金閼智)는 금관국수로왕(首露王)의 후예요. 수로왕은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인고로 금성(金姓) 으로 하였다. 하고 김윤신 장군 비문에 이로기를 헌원(軒轅)의예손이요.소호(少昊)의 아들이나 그 시조수로왕은 신라의 동성(同姓)이라 하였다. 또한 삼국지(三國誌)를 살피건데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이라. 그 고노(故老)들이 말하기를 본시 진(秦) 나라 폭정을 피하여 한국으로 오자.마한이동쪽한 구역을 나누어주었다하고. 언어와 풍속이 마한과 같지 않고 진인(秦人)과 같으므로 진한”(秦韓)이라 이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진한은 지금의 영남지방을 말한다.2 중국고사(中國古史)의 개벽시도(開闢始圖)에서삼황세계(三皇世系)로천황(天皇)은복희씨(伏犧氏).인황(人皇)은 신농씨(神農氏). 지황(地皇)은 황제씨(黃帝氏)를 칭한다. 옛천자(天子)금천씨(金天氏)의 후인(後人)소호씨(少昊氏)를 금덕왕(金德王)이라하여. 금천씨(金天氏)라 칭하였다. 칭소호내황제지자 소호금천씨(稱少昊乃黃帝之子 少昊金天氏)라 하고, 중국백납본24사왈 홍제지황야(百衲本24史日黃帝 地皇也)요. 황제헌원(黃帝軒轅)의 장자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之世 B.C 2777)라 하였다. 백납본계(百衲本系) 62세(世) 해당인 김수로왕(金首露王 A.D23-AD199)의 가야(伽倻)의 상계(上系)가 중국에서 왔읍을 짐작할수 있다고 본다3 허황후 현록(許皇后 懸錄) 서기 48년 (건무 24년 무진) 소로왕 건국 7년에인도아요디아(AYODHIA)왕국의공주(公主) 보주허왕옥(譜州 許黃玉 서기 32년생) 당16세에 파사석탑을배에 실코 김해망산도에 도착하여김수로왕과 혼인을하니 보주태후허씨(譜州太后許氏)에 오르시였다. 10왕자에 두공주를 두시고 서기189년 3월 1일 붕어하시다. 지금으로부터 1950여년전에 국제결혼의 실제 입증으로서 서기 1999년4월 29일(음 3월15일) 김해숭선전춘향대제(수로왕과 허황후의 제일)일에 허황후의 모국인 인도아요디아, 옛왕손. 비랜드라.모한프라타프 미슈라 ,B.H.P MISHRA 씨 부처가 인도주한 대사의 안내로 김해대제에 참례하고 옛왕띠고모할머니 이신 가락국시조대왕비 허왕후릉에 참배하였다. 이에 인도국의 배려로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락국기(駕洛國記) 부분의 전설적인 성지에 허황후 탄생지인 아요디아 성사류 강변에가락공원(駕洛公園)을 조성하고 공원대에 허황후 탄생유허비 기념탐을 건립하고 서기 2001년 3월 6일에 역사적인 제막식을 가졌다. 이로서 시조할머니 (허황후)의 원유를 알수 있게 되었다참고. 묘서. 다만 허황후의 비문에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지릉(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고 하였는데 보주는 중국지명인 옛촉(蜀)나라. 땅 사권성 안악(安岳)의 옛지명이며. 수로왕릉 건물이나. 신머산 은하사의 대웅전에서 보면 마주보는 물고기문양(쌍어문 雙魚紋)이 있으나 이는 아락크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어 인도아요디아와 중국의 보주(普州)와 무창등을 거쳐 김해 및 일본의 구주(九州)지방에 흩어져잇음을 볼수 있다고 한다. 중국보주 땅에 허씨(許氏)의 집성촌(集姓村)이 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