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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金弘道)

작성자 최고관리자 등록일 2015-12-30 07:06:23 조회수 3,066회 댓글수 0건

이름

김홍도(金弘道)

단원(檀園)

파명

사능(士能)

관직

시대

조선

정보

천재화가


단원 김홍도(金弘道)
부 : 김석무(金錫武)
1745년 (영조 21)~ ?.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 단구(丹邱). 서호(西湖). 취화사(醉畵士). 고면거사(高眠居士). 첩취옹(輒醉翁)으로 화원 장필주(張弼周)의 외손자 이며 김석무(金錫武)의 아들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로 강세황(姜世晃)에게 그림을 배웠다.

1773년 영조(英祖)의 어진(御眞)과 정조(正祖)의 왕세자 시절 초상을 그리고 이듬해 감목관의 직책을 받아 사포서(司圃署)에서 근무하였다.


1777년 신한평(申漢枰), 김응환(金應煥), 이인문(李寅文) 등과 함께 서울 중부동 강희언(姜熙彦)의 집에 모여 공적, 사적으로 주문받은 그림을 그렸으며, 이 당시 벼슬은 별제(別提)였다.


1781년에는 정조어진익선관본 제작에 신한평, 한종유(韓宗裕)와 함께 참여하고 그 공로로 안기역(安奇驛)의 찰방을 제수 받았다. 이 무렵부터 명나라 문인화가 이류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檀園)'이라 자호(自號)하였다.


1788년에 김응환과 함께 왕명으로 영동 9군과 금강산 일대를 탐방하고 실경(實景)을 그렸고,


1791년에는 정조 어진(正祖御眞) 원유관본(遠遊冠本) 제작에 참여한 후 연풍 현감에 임명되어


1795년까지 봉직하였다.


1790년 수원 용주사(龍珠寺) 대웅전에 《삼세여래후불탱화(三世如來後佛幀畵)》를 그렸고,


1795년(정조19) 연풍현감(延豊縣監)이 되었다가 곧 사임하였다. 이듬해 왕명으로 용주사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삽화를 그렸으며,


1797년 정부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삽화를 그렸다. 산수화 ·인물화 ·신선화(神仙畵) ·불화(佛畵) ·풍속화에 모두 능하였고,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산수화는 사실(寫實)묘사와 조국애가 어울려서 조국 강산의 아름다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으로 당시의 신윤복(申潤福) ·이인문(李寅文) ·김석신(金碩臣) ·김득신(金得臣) 같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풍속화는 서민사회의 생활정서와 농(農) ·상(商) ·공(工) 등의 생활정서를 주제로 하여 그들의 생활모습을 익살스럽고 구수한 필치로 그린, 일종의 사회풍자를 곁들인 작품들이다.
기법도 서양에서 들어온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과감히 시도하였는데, 용주사의 《삼세여래후불탱화》에서 볼 수 있듯이 색채의 농담(濃淡)과 명암으로써 깊고 얕음과 원근감을 나타낸, 이른바 훈염기법(暈染技法)이 그것이다. 작품에 《소림명월도(疎林明月圖)》《신선도병풍(神仙圖屛風)》《쌍치도(雙雉圖)》《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낭구도(浪鷗圖)》《군선도병(群仙圖屛)》《선동취적도(仙童吹笛圖)》《풍속화첩(風俗畵帖:야공도 ·서당도 ·씨름도 ·무악도 등)》《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퇴임 후 만년에는 병과 가난에 시달리다가 여생을 마쳤다. 그는 산수, 도석인물, 풍속, 화조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그래서 정조는 "그림에 관련된 일이면 모두 홍도(弘道)에게 주장하게 했다."고 할만큼 그를 총애 했으며, 표암(豹巖) 강세황으로부터는 "근대명수(近代名手)" 또는 "우리 나라 금세의 신필(神筆)" 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조선 후기 중엽의 회화양식을 완성하고 후대의 전형을 창출하는 등 한국적 화풍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김홍도는 어릴 때부터 신선도를 매우 잘 그렸는데 병풍에다 그린 신선도는 그가 이미 17세 때에 그린 것이다. 또한 산수화에도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있었는데, 그가 그린 산수화의 특징은 맑은 색채와 순수한 선으로 자연을 그대로 잘 나타낸것이 특징이다. 김홍도의 산수화 속에는 우리나라의 고유한 미풍양속과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산수화가 우리 국민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이 우리 고유의 풍물에 친근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작품 중에서 또 하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풍속도이다. 그의 풍속도는 예술로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사회의 그 당시 풍속을 연구하는 역사 자료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당시 김홍도와 나란히 쌍벽을 이룬 화가는 신윤복이었다. 그러나 신윤복은 양반과 귀족들의 생활이나 귀부인들의 모습을 많이 그렸으나 김홍도는 반대로 가난한 백성들이나 농민들의 소박한 풍습과 생활 모습을 즐겨 그렸다. 김홍도와 같은 창작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고, 그가 남긴 업적은 그 당시 우리 나라의 풍물과 자연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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