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김홍복(金洪福) | 호 | 동원(東園) |
파명 | 자 | 자회(子懷) | |
관직 | 시대 | 조선 | |
정보 |
부 : 헌납(獻納) 덕승(德承)
1682년(숙종 8)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685년에 봉교가 되었고, 이듬해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해 정언이 되었고, 이듬해 지평으로 승진하였으며 도당록(都堂錄)에 올랐다. 1688년에는 고부사의 서장관으로 청에 다녀왔다. 1694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승지·예조참의·여주목사·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시문집으로 『동원유고(東園遺稿)』가 전해지는데, 7권 2책으로 필사본(筆寫本)이다. 그가 죽은 지 200여 년 뒤 후손인 현진(顯眞)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순익(李淳翼)의 서문과 권말에 이기종(李起鍾)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331수, 권2에 『정련록(鼎聯錄)』이라 하여 박태순·이현의 시 56수가 수록되어 있다. 권3에 제문 8편, 축문 11편, 교서·비답(批答)·강량문 각 1편, 조(詔)·잡저 각 4편, 잠 2편, 명 3편, 송(頌) 2편과 권4에 소 32편, 계문(啓文) 16편, 시사(時事) 1편이 있고 권5에 묘표 3편, 묘지 8편, 묘지명·광지(壙誌)각 1편, 광지명 2편이 실려 있다. 권6은 『연행일기(燕行日記)』, 권7은 부록으로 세계·생변(生邊)·사록(事錄)·교서·사제문·제문·만사·비지(碑誌)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규장각도서에 소장되어 있다.
이 중 시에는 최석정·이숙·이의창·남구만·이굉 등이 중국으로 사행 떠나는 것을 전송한 시가 많다. 그리고 과제시(課題詩)인 「화악루(花켍樓)」·「동작대(銅雀臺)」를 비롯하여 윤덕준·유득일·홍가상 등과의 화답시, 그리고 이현조·유성룡·홍계한 등의 시에 대한 차운시(次韻詩)들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
권2의 『정련록』에도 「수마(睡魔)」·「차창려남산시(次昌黎南山詩)」·「춘야연구(春夜聯句)」·「기방중소견잡물(記房中所見雜物)」·「이십팔수체(二十八宿體)」·「육부체(六府體)」·「의한맹성남연구(擬韓孟城南聯句)」·「건제체(建除體)」 등 다양한 시가 실려 있다. 그리고 김해김씨시조릉(金海金氏始祖陵)·왕비릉 등을 대상으로 지은 제문과 헌릉(獻陵)·익릉(翼陵)·장릉(章陵)·숭릉(崇陵) 등의 개축과 교하·평산·이천 등의 향교를 수리한 내력을 기록한 축문이 있다. 또 대작(代作)으로 된 「부체찰사김석주교서(副體察使金錫胄敎書)」와 「영의정유상운삼도정사불윤비답(領議政柳尙運三度呈辭不允批答)」 등이 실려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 조(詔)의 「당종천하사수조(唐縱天下死囚詔)」·「송치의창조(宋置義倉詔)」·「한명도화공신기린각조(漢命圖畵功臣麒麟閣詔)」 등과 잡저의 「한부배위상운중수제(漢復拜魏尙雲中守制)」·「한부배제갈량승상제(漢復拜諸葛亮丞相制)」, 그리고 잠의 「무경민사잠(無經民事箴)」, 명의 「목농부명(木農夫銘)」, 송의 「비복즉전공송(卑服卽田功頌)」·「해불양파송(海不楊波頌)」 등과 「대절식어공리판(對?食御供梨判)」 등은 역사적 사실 및 현실적 문제에 접근하여 폭넓은 주제와 다양한 논지를 전개한 것이다. 또 소에는 검열·대교·정언·지평·황해감사·예조참의·승지 등에 대한 수많은 사직소가 있고, 당시의 현실문제를 간간히 언급한 글을 비롯하여 「청소강첨사정후량파직계(請所江僉使鄭后亮罷職啓)」·「청금평군곽삭탈관작지명환수계(請金坪君튞削奪官爵之命還收啓)」·「청경양찰방임대년태거계(請景陽察訪任大年汰去啓)」 등을 포함한 당시 당쟁에 얽힌 관리들의 출척(黜陟)에 관계된 다수의 글이 실려 있다. 그리고 1685년 그가 『갑을록(甲乙錄)』에서 채록한 「한원간통(翰苑簡通)」과 그 외 「재한원시사(在翰苑時事)」 등은 당시의 치열한 당쟁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권6의 『연행일기』는 그가 1688년 10월에 사신의 일행으로 중국에 갔다가 이듬해 정월에 돌아올 때까지 겪은 일과 감상을 적은 것으로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밖에 부록에는 그의 가계에 대하여 소상하게 서술한 「세계」·「생변」 등과, 왕의 교서를 비롯하여 이덕성·윤증·박세당·최석정 등이 그에 대하여 서술한 글이 있으며 그의 부인인 신씨의 「사록(事錄)」과 「세계」도 수록되어 있다. 묘는 와부읍 율석리에 소재하고 있으며, 그를 기리는 작은 돌비인 묘갈도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 『국조인물고』; 『국조방목』;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7, 1991